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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영락(零落abject)의 영토



이용우(미디어역사문화연구자)


자리의 얼굴성

땅은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이다.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1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물리적 공간은 자연, 정신적 공간은 공간에 대한 형식적 추상을 의미하며, 사회적 공간은 물리적·정신적 공간에 대한 인간 상호작용의 장소라 말했다. 만일 정신적 공간이나 추상적 공간이 사회적 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별도의 개념이 아니라 집단과 개인이 공존하고 역사적 맥락들로 구성된 하나의 구성체라 말할 수 있다면, 결국 공간적 실천이란 단순히 하나의 영토/토지의 물리적 영역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있어 모든 측면과 요소, 순간이 공간의 자장 속에 투영되는 하나의 인지적 영토”2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육신, 토양, 자연이 인간과 만나 주조해낸 위계질서, 종과 유형학이라는 근대적 배제와 포섭 논리 안에 인류가 발을 내딛기 전, 대지/장소/영토는 인간의 인식 속에 배제된 공백의 시공간이자 이성적 근대성의 영구적 타자성으로 존재해왔다.

최찬숙 작가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론적 지형학 속에 의도하거나 의도치 않은 이유로 주변으로 밀려난 것들, 이주자와 정주자를 구분 짓는 인지적 방식들, 인간이 영토를 소유한다는 개념의 변천 과정들, 땅과 신체에 연관된 다양한 불가분의 관계성에 천착해왔다. 오랜 베를린 체류기간을 통한 타자/이주자로서의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적 이주와 물리적 이주에 배태된 장소성과 기억의 다양한 의미 양상을 마치 연극무대(scenography)를 연상시키는 아우토슈타트(Autostadt)3와 광유전학(optogenetics)4으로 대변되는 미래 기술의 형상인 옵토로돕신(opto-rhodopsin)5이라는 생경한 개념으로 풀어낸 《최찬숙 개인전: 정신적 이주에 관한 보고서 파트1, 이동기술 편》(2015) 전시, 일본군 위안부, DMZ 민북 마을 양지리 여성, 해방 후 작가의 할머니로 대변되는 한국인과의 결혼이 장려된 일본인 여성들 등, 디아스포라 이주민 여성들의 상흔의 궤적, 이들의 느슨하고 임시변통적 연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비자발적 자의적 이주 안에 파생되는 불안정성과 망설임, 불안함과 동요라는 감정의 파동들이 야기시키는 기억의 아카이브를 프리즘처럼 펼쳐 보인 《Re-move》(2017) 전시에 이르기까지, 최찬숙 작가는 영원히 정주하지 못한 타자들이 촉수를 길게 늘어뜨리며 송신하는 이 미세한 진동과 일상의 균열에 주파수를 맞춰 파편화된 타자의 삶과 정동의 심상이 직조해내는 수행성의 성좌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유기체적 작업 서사들에 드러나는 작가의 관조적 시점은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 존재론적 타당성, 그리고 개체화된 사적 서사가 집단 기억과 맞닥뜨리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불협화음, 역사적 사실/사건들 속에 망각된 개인적 정황의 지점들, 표백되고 공백화된 빈 공간으로 남은 자들의 흔적과 장소에 대한 기억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들을 작품 속에서 환기시킨다.



유기체적 장소성과 영토화된 감각: <60호>

신작 <60호>(2020)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토지 개간 사업과 대북 선전을 위해 북측에 배치된 112개의 DMZ 지역의 민간인출입통제구역에 자리잡은 선전용 마을 여성들의 사적 서사를 다루고 있다. 삽슬봉 아래 펼쳐진 강원도 철원군 양지리 마을은 저렴한 토지와 집 소유를 약속한다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언술로 대규모 이주민 거주 군락을 이루었고, 버즈-아이 뷰(Bird’s eye view)로 촬영된 구글 어스의 양지리 파노라마는 기실 ‘적’의 관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북으로 창을 내고 형형색색 지붕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내부는 거주자들이 임시변통으로 각기 다른 복잡한 가옥 구조 형태를 띄고 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개인의 감정과 행동이 고스란히 장소성—건축적 환경과 그 의도성—에 특정한 가시적, 비가시적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로테스크한 양지리 가옥 내부 전경을 훑고 지나는 카메라 앵글은 영토 소유에 대한 개인적 심상지리의 내밀한 기원을 내시경처럼 투사한다. 해방 이후 수많은 이주민들을 전쟁, 찬탈과 수복, 투기라는 여러 겹을 지닌 DMZ 인근 민북 마을로 불러모은 그 들끓는 욕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과연 우리의 소유일까? 원래 월북자나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소유자 부재의 땅이 되었고, 1972년 국토이용관리법이 발촉되고 1980년대 초반 정부가 민통선 지역 토지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면서, 땅 주인이라 주장하며 등기부 서류를 거머쥔 ‘토지소유자’들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며 양지리 거주민들과 마찰이 생겨났다.6 그 땅에 오랫동안 토착해온 이주민들, 특히 수많은 여성 이주자들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 채 결국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찬숙은 이 기묘한 일련의 사태를 관망하며 땅/몸/소유의 관계망과 영토정치적 사건들이 환기시키는, 마치 인간과 토지가 하나의 신체처럼 꿈틀대는 유기체적 장소성으로 발현되는 지점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나아가 토지 소유권이라는 사회 법제적 방향성과 잠재적 변화가능성을 미시사적 관점에서 내밀하게 조망한다. 가부장적 호주제로 인해, 전쟁에서 혹은 일상에 산재한 지뢰로 남편을 잃은 여성 이주자들은 이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 채, “부엌 한 칸, 방 한 칸”의 뒤틀린 양지리 마을 틈바구니에 은밀하게 포자 하는 양치식물처럼 위태한 생태계에 일시 정주한다. 이 적정의 순간, “순 묵갱이”같은 “남자 이름들이 새겨진” 땅을 개간하며 묵묵히 정주의 삶을 꿈꾸던 자들은 마을 군인들에게 숫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60호>는 다름 아닌 그 장소가 거주하는, 이제 숫자가 되어버린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름에도 습하고 서늘한 이 민북 마을 집안 곳곳에 실재 태양보다 더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온풍기들(<인공 태양>, (2017)이 숫자로 불리는 여성 이주자들의 삶에 온도를 부여한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양지리 가옥 미로를 롤플레잉 게임처럼 횡단하고, 역사적 파국의 상징인 DMZ 폐허 전경을 구글 어스로 간략히 요약할 때, 우리는 이 영상의 박진감과 충격의 무게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는, 감정적 동요가 거의 없어 보이는 작가의 차폐(遮蔽)적 관점을 목도하게 된다. 작가의 이런 사심 없는 시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비인간적 장소/영토, 나아가 타자화된 인간들이 결국 거시사적 풍경 속에 부조리하게 마주 해야만 하는 강압적 공존의 관계성과 그 세속화된 기억들을 보다 명징하게 인지하게끔 한다.

60호로 일컬어지는 영락한 자들의 비가시적 얼굴/얼굴성처럼7 비스듬한 영토/땅/장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촉발시키는 어떤 이물감, 병리적 특질, 감정이나 분위기의 파동들, 나아가 거시적 세계관과 집합 기억이 결코 도달하거나 감지해내지 못하는 미세한 비가시적 파동은 결국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의 심상 지리의 폐부를 관통하며 인간 개체와 장소 간의 공명이 불러일으키는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의 역학관계를 세밀하게 드러내는 기제로 작동한다. 마치 이들이 영상 속에 자조적으로 트로트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내가 내가 드라마, 이 사연을 누가 알 텐가”) 페이드-줌 인앤아웃 되는 과정과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북한에 대고 “불과 분노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정치적 언설을 통해 남북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장면을 상호 병치하듯, 집적되고 산재하는 영토와 거주, 이주와 기억, 정주와 비정주, 그리고 이미지들의 나열과 리듬이 직조하는 연결고리들의 알레고리는 신체의 기억과 땅이라는 물질성이 지닌 서사적 상징적 골격(skeleton)들을 서서히 와해하고, 광물의 파편과 그 부유하는 무기물로 대체-형상화된다. 작가의 관조적 의도대로 우리의 시각은 마우스의 커서를 따라 서사를 이동시키는, 하나의 시각적 서사 기표로 작동하는 무기물의 형상을 쫓아 다닌다. <60호>의 돌, 혹은 구리의 광물이미지는 작가가 기존 작품들에서 구현한 주체들의 젠더화되고 타자화된, 땅을 소유한 적 없이 땅의 기억만을 내재하고 있는 신체를 대리하며, 영토화된 감각과 지리적 개념적으로 규범화된 구분틀 안에 영구 포섭되지 못한 채 암흑 속을 공회전하는 비인간적 영락의 주체들(광물/비인간적 주체들)과 조응하기 시작한다. 이 이미지들은 마치 댓구처럼 <qbit to adam>(2021)으로 이어진다/이어져 온다.



비정주성과 시공간의 초지역성:
<qbit to adam> 어느 누구의 것이 될 수 없고,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없는,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장소는 처음부터 의미 있는 조건이나 배경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장소와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형성된다. 즉 장소와 환경을 기억하고 변형하면서 관계 맺은 행위와 기억의 집적은, 거주/정주의 일부이자 증표이며 이는 한 장소에 대한 감각을 보다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최찬숙 작가가 팬데믹 기간 동안 진행해온 신작 <qbit to adam>은 DMZ, 경계지역, 이주와 여성 서사를 통해 천착했던 땅과 토지로 시각화된 주체성/주체화의 비정주성에 대한 관심사를 개념적으로 확장하고 시공간적으로 팽창한다. 양지리 마을에 인장처럼 날인된 밀려난 자들의 조각난 기억들, 이주하고 정착하고 소멸하는 자아의 상실감과 밀려난 공동체의 와해라는 구심적/원심적, 정적/역동적, 열림/닫힘의 로컬리티의 서사는, <qbit to adam>에서 칠레 북부 고대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과 광산에서부터 디지털 가상 시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횡의 시공간성 안에 놓인 장소성/영토성을 통해 로컬리티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로컬리티에서 초지역적 신체/땅/장소로 이어지는 질문들의 존재론적 맨살을 드러낸다. 최찬숙은 몸/땅/역사화된 텍스트라는 옹이진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재전유하며, “어느 누구의 것이 될 수도, 모두의 것이 될 수 없는” 땅/장소/공간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의미망과 대안적 방향성, 인간-비인간 주체성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qbit to adam>을 통해 ‘쏟아’낸다.

마치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이 영구불변하며 유기적 부패에 저항하는 그레뱅 박물관의 밀랍 인형의 불멸성에 매료된 것처럼,8 코퍼맨이라는 은유로 시작하는 <qbit to adam>은 유기물과 무기물, 삶과 죽음의 경계, 미래와 과거의 탈구, 폐광산 폐기물 흙 위에 뒤덮인 또 다른 흙이라는 하나의 은유로서 “땅의 무덤”이 환유하는 무기물/땅의 소멸과 무기물/비인간의 죽음이라는 개체성의 획득, 땅의 소출과 영토 소유에 대한 근현대사적 영토 개념의 형성과정 속에 배태된 자아와 타자, 포섭과 배제, 몸과 땅에 드러나는 관계성, 디지털 환경과 데이타가 재전유한 새로운 영토성과 신체 감각의 확장된 영토로서의 가상-주체의 확장, 현재라는 관계적 시간 안에 개체가 개체로서 순수하게 상호 접촉할 수 있는, 하나의 성스럽고 완결된 개체성을 획득하는 장소로서의 공간성, 그리고 이 모든 질문들의 재귀적 귀결에 놓여진, 마치 우리를 청동거울처럼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우리가 지금 디디고 있는 바로 이 정신적 물리적 장소의 의미라는 존재론적 질문들을 말하고 있다.

돌, 구리, 살, 금속으로 순환되는 파편들이 무중력을 떠다니는 땅의 조각이자 기억/데이터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고(이 순환 반복 구조는 3채널 스크린 앞에 구리 메쉬 반투명 스크린으로 설치된 영상에서도 반복된다), 33분 동안 교차되는 영상들을 서로 다른 3개의 목소리/선험적 주체로 관통하는 내레이션은, 작가가 전시라는 “장소” 안에 관객들을 온전히 작가의 서사 안에 포섭해 두려는 하나의 욕망이자 구심점 역할을 한다. 압도적 스케일의 스크린 위에 배치된 땅/몸/소유에 관한 개별 서사는 명징하게 개체를 작동시키는 시스템이나 그 존재의 이유, 혹은 존재 가능성을 설명하는 개체성의 척도로 제시되지 않고, 오히려 액체처럼 공간 안을, 스크린 속을 스며들며 땅/몸/전시공간이라는 서로 다른 지형과 이 지형들이 지닌 미결정으로서의 열린 공간, 어떤 평행의 상태와 기준면, 좌표를 빗겨 난 비위계적 유추를 편편하게 이어주는 간주곡으로 기능한다. 이 서사들은 전시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합류하고 분리되며 관계를 재정립하는 하나의 여정 그 자체이다.

마치 몽골 샤면의 청동거울처럼 어둡고 흐릿하게 연출된 전시 공간의 바닥 면을 통해 자아와 스크린을 되비추는 자기반영적 심상의 차용은 (스크린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바닥과 같은 동박 시트로 마감되어 있다), 이미지를 비추되 원래의 상을 제대로 투영하지 못한다. 즉 자기반영성을 투영하기보다는 지속적 이미지의 탈구, 이미지의 비결정성과 변동가능성을 통해 현재의 장소와 현실의 자아에서 탈출을 시도하며, 미세한 이미지의 왜곡과 흔들림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자극하고 사유를 권장하도록 설계된 존재론적 거울로 작동한다.9 작가는 이런 시공간을 초월하는 횡단의 사유 공간적 설계를 마치 꼼꼼한 시노그래퍼(scenographer)처럼 전시 공간 우측에서부터 차례로 스크린의 경사를 10도, 23도, 28도로 미묘하게 기울여 놓는다. 평행하지만 조금씩 엇나가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각운처럼, 화면들은 우주의 파장을 감지하는 안테나들과 태양이 뜨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무릎 꿇은 참회자의 형상을 띄고 있는 땅의 형상 페니텐티스(Penitentes)처럼 비스듬히 형상화되어 있다. 인공 태양의 궤적을 따라 대지의 형상을 투영하는 스크린은 반사되고 중첩되는 이미지와 전시 공간, 그리고 3개의 이질적 목소리가 환기시키는 현전성이라는 다중 감각으로, 관객의 신체와 공간에 대한 공감각을 통해 마치 관객이 또다른 작품의 오브제가 되어 전시의 서사적 빈공간으로 메우는 무대적 장치로 작동된다.

<qbit to adam>은 이처럼 미완결의 서사들이 경계를 탈주하고 횡단하며 새로운 ‘땅’을 만나려는 시도이자, 수많은 개별 서사들이 교차하고 유목하며 특정한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붙박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며, 이전 개념과 논의들을 차용하고 반복하며 차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생성의 흐름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전시적 변증법적 담론장이 된다. 이는 근대 역사의 서사 구조틀 안에 영구 타자화된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담론의 파편적 시각화, 비이성적 타자적 비과학적 부정형(不定型, indeterminate form)으로 간주되어온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사유와 이로 촉발되는 인간적 감응과 인본주의적 선택으로 대변되는 근대성이라는 서사의 뒷면을 복권한다는 작가적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최찬숙 작가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를 통해 역사적 구술 안에 서사적 진공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자연/땅/토지/영토성 속에 놓인 인간적-비인간적 주체들, 그리고 바로 그 장소성 안에 인화된 다양한 기억과 해석들의 양피지를 내밀한 개인적 서사로 필사(筆寫)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재호명한다. 최찬숙의 <qbit to adam>은 또한 현 시각 예술 담론의 동시대적 관심사인 인간/자연의 위계 도상, 코로나19와 메타버스, 생태계의 급락을 통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도래 안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며 인류가 남긴 족적이 고스란히 그 궤적(인류세)으로 남는 현 지질 시대의 지구라는 행성의 파국적 동시대성에 대한 예술적 감응과 상상적 지형들을 신화적, 문학적, 과학적 논의들을 상상적 교차 서사를 통해 재현해낸다. 전시 공간의 실재성은 이제 관객의 상상력 안에서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어김없이 우리를 매혹한다.



코다 : 순수 기억으로서의 영토성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공간의 시학』 중에서10

과거가 현재를 규정짓는 선험적 조건이라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역설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현재와 과거가 동일한 시간 안에 존재할 때라야 현재의 시간이 오롯이 흐를 수 있다.11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순수기억은 어떤 교훈을 과거로부터 배웠지만 이는 시간성에 의해 다시 반복될 수 없으며 이미 우리 신체 내부에 부재한다는 어떤 인식론적 상태를 의미한다. 순수 기억은 단순히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회상하는 행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자체가 하나의 존재론적 독립성이라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무한하게 수축 이완하면서 동시적으로 공존 가능한 존재 양태를 만들어 내는 상태인 것이다.12 마치 미라의 무릎에서 탈구된 광물이 확대되어 프렉탈 이미지들을 드러낼 때, 기억에 관한 아낙시메네스의 아주 오랜 질문이 우리에게 순수 기억을 환기시키며 스며드는 것처럼. “신이 흙으로 인간의 몸을 만든 후 영혼을 위해 숨을 불어넣었다는데 그 숨은 차가운 바람이었을까? 따뜻한 바람이었을까?

차갑고도 따뜻한 바람을 불 수 있는 인간의 양가적 능력, 두 세계의 공존과 질서. 그리고 그 변환 가능성들에 대한 작가적 관심은, 디스토피아적 현실 세계 안에 곧 태어날 작가의 아이의 미래와 어머니의 임종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주검을 만졌던 죽음의 촉감을 생생히 기억하는 작가의 경험들과 혼재되어 있다. “내 몸이 맞게 될 죽음의 순서를 상상”하며 가상 임사 체험(near-death experience)에서 차가운 입김을 내뿜고 있는 모성성을 담보한 작가 자신과, 자고 있는 아이의 숨소리를 통해 따스한 숨이 넘나드는 개체들이 활약하는 생동성의 병치를 통해, 최찬숙 작가는 변화하는 온도를 견디고, 비워가고, 채워지는 비정주성으로서의 신체라는 장소성에 대한 질문을 제시한다. 베르그송이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가 이미지의 형태를 띄지 않으면서도 어떤 특수한 이미지로 존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설파했듯, 작가는 신체와 물질이라는 어떤 현상의 바탕이나 증표가 아닌, 전체적이고 두리뭉실한 시제 없는 기억의 표상 체계, 즉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종의 관념이 도사리고 있는/있을,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실체들의 공존가능성을 시각화하(려하)고 있다. 이 심상들은 결국 보이지 않되 현전하고, 우리 정신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13 하나의 지각이자 기억으로 체험된다.

최찬숙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무릎이 지닌 중첩된 메타포는 이런 의미에서 사뭇 의미심장하다. 코퍼맨의 무릎에서 파생된 광물은 무릎 꿇은 참회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땅의 형상인 페니텐티스 재현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교차 스크린 속 강서구의 특수학교 설립 반대에 무릎 꿇으며 호소하는 어머니의 서정적 인서트와 합류한다. 무릎이라는 메타포는 기실 굴복, 참회, 깨달음(무릎을 탁 치다)의 순간이자, 개체에서 파생된 또 다른 개체 생성를 의미한다. (‘슬하의 자식’의 ‘슬하膝下’는 무릎 아래라는 의미이다.) 곧 태어날 아기가 기어다니게 될 근미래의 가장 안전한 비정주 공간에 대한 개인적 사유는 작가에게 땅/장소/영토성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절박하고도 중요한 순수 기억이다. 잠깐 사이 아이는 방에 놓인 것들을 입 속에 넣고, 뜨거운 것에 데이며 그렇게 세상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장 안전한 땅/장소/영토인 자신의 무릎 아래에 놀게 한다. 최찬숙의 <qbit to adam>은 작가와 관객이라는 이질적 주체가 전시를 바라보는 개체적 몸/신체를 통하여 지각과 기억을 이끌어내고 사색과 성찰의 경험을 통해 실체의 공존가능성을 꾀하는 유기적 총체성으로서의 장소이다. <qbit to adam>에 드러난 장소성에 대한 환유와 기술의 진보로 인한 자연/땅/토지/영토성에 개념적 감각적 의미 확장은, 유기물도 무기물도 아닌 이 두개의 ‘상태’가 상호 공존하는 코퍼맨처럼(코퍼맨의 형상은 이후 사이버 아바타의 얼굴을 띈다), 영토와 신체의 분리불가분성 혹은 공존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고대 광산에서부터 가상 화폐 채굴에 이르는 역사적 노동과 가상적 소유라는 과거와 근미래의 ‘역사’를 조망하며 근대 인식론의 토대가 된 이성적 사고의 서사 체계와 담론틀을 차례로 전복하며, 이 프리즘들이 발광하고 있는 의미들의 방향성을 의도적으로 우회하고, 감응하며, 선회하고, 재현한다.

최찬숙은 이처럼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잠재성, 즉 소유와 약속의 개념 자체가 없었던 원초적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순수 기억을 비통시적으로 서사화하고, 인간의 개입과 자연과의 교섭 결과가 결코 땅/공간/영토의 본래 의미를 해체할 수 없으며, 나아가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의 감각이라는 현행성(顯在性, actuality)에 대한 온당한 의미들을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최찬숙은 작가 스스로 복권하고 싶은 타자의 기억, 비인간적 영토성의 주체성, 공동 침묵의 토대 위에 구축된 서사적-상상적 진공 상태로서의 타자/땅/공간/영토의 의미 해체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반향 속에서 우리는 시를 듣고 울림 속에 우리 스스로의 시를 읊조린다. 실체들의 공존가능성을 위한 반향과 울림은 그래서 ‘존재의 전환’을 이끌어낸다.

최찬숙의 <60호>와 <qbit to adam>이 제시한 메타 서사와 탈계보학적 상징 재현은 기실 이제껏 존재해왔지만 억누르고 감출 수밖에 없었던, 비가시적 자연/땅/토지/영토성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위계 지형을 가시화하고, 명확히 규정될 수 없던 잠재적 현실을 개체적 감각이 원래 지니고 있던 순수 기억의 서사로 와해하고 파열하며, 서서히 원래의 따뜻하고 매끈한 질감들을 회복할 수 있다는/있을 것이라는 어떤 다짐이자 증표처럼 읽힌다. 에필로그의 돌, 구리, 살, 금속 위에 읊조린 작가 개인의 내밀한 서사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내가 죽으면 돌아갈 땅이란 과연 어떤 곳인가?” 이 질문은 반복되는 돌림노래처럼 전시장 속을 울려 퍼지는, 반향과 울림처럼 관객들과 공명한다. 그 장소는 바로 “어느 누구의 것이 될 수 없고,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없는 약속”된 땅(promised land)인 것이다.



1. Johann Gottfried Herder, #Ideen zur Philosophic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1784): “The land is not the object of scientific perception, but a sign that reveals what is within”
2. Henri Lefebvre, #The Production of Space#, Trans. Donald Nicholson-Smith (Oxford: Basil Blackwell, 1991), 8.: “spatial practice consists in a projection onto a (spatial) field of all aspects, elements and moments of social practice.”
3. 자동차와 도시의 합성어로 실재 존재하는 폭스바겐사의 공장 투어 프로그램이다. 이 거대 테마파크의 큐레이토리얼의 전유를 통해 작가는 자가용의 보급이라는 이동기술의 발전을 통해 신체성의 이주가능성 변화를 첨단 테크놀로지의 활기찬 가이드 멘트와 이와 상반된 텍스트/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일상적 풍경과 기억의 찰나들이 다른 빛으로 지워 나가며 물리적 신체적 이주/ 정신적 이주에 대한 중첩되고 양가적인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4. 빛과 유전학의 합성어. 빛의 조절과 유전공학 기술을 통해 뇌 활동을 조절하는 기술을 일컫는다.
5. 빛과 눈의 망막을 감지하는 색소 단백질의 합성을 통해 눈을 통해 수용되는 빛의 전기적 자극으로 기억을 이식한다는 일종의 작가의 가상장치이다.
6.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박정희 정권이 DMZ 지역에 대남선전과 민간방위를 목적으로 재건촌과 통일촌 등 국가촌락을 짓기 시작했다. 양지리는 재건촌 중 하나인데, 재건촌은 영세민이 입주하여 삶의 질이 낙후되었고 국가가 토지나 주택의 사유권을 인정하지 않아 임시 거주지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1972년 「유신헌법」은 국토계획의 필요성을 명시하고 동년 제정된 「국토이용관리법」은 도시·비도시 지역의 체계적인 관리를 법제화했다. 토지관련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79년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정부가 경제활성화 방안으로 1980년대 초반 민통선 지역 토지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와 보존등기를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전의 토지소유 증빙서류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 토지사유권을 주장했고, 이미 마을에 입주해 지뢰를 제거하는 등 위험을 무릅쓰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입주민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정희남, 2010, 전상인・이종겸, 2017 참조)
7.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기계적 무의식』(L’inconscient machinique, 1979)에서, 무의식의 잉여성의 공간적 형식을 ‘얼굴성’이라 불렀다. 그는 얼굴이 특정한 사회 구성체의 산물이자 계산된 표정을 통해 발산된 기호와 표현을 통해 특정한 감정을 발산하는 표정을 지니게 되었을 때라야만 비로소 신체/머리에서 분리된 독자적 ‘얼굴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표정이라는 기표가 내재한 얼굴이야말로 비로소 타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이자 기호가 되는 것이다. Félix Guattari coined the term “faciality- landscapity” (visagéité-paysagéité) to describe the spatial form of the redundancy of the unconscious. Guattari explained that a face is a product of specific social formations. When certain facial expressions are acquired by symbols and expressions that are transpired through calculation, the face finally achieves its independent ‘faciality-landscapity’ that is detached from the body/head. In other words, a face embedded with facial expressions as signifiers is what becomes a tool and sign to convey one’s intention. Félix Guattari, #The Machinic Unconscious: Essays in Schizoanalysis# (Los Angeles, CA: Semiotext(e)/Foreign Agents Series, 2011).
8. 발터 벤야민은 그라뱅 박물관에 있는 밀랍인형을 이상적 이미지(Wish Image)라 묘사했다. 밀랍인형이 지닌 영원한 덧없음, 그 어떤 영구 불멸의 형태도 밀랍전시장이 보존하는 것처럼 덧없고 세련된 형태를 선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전 벅 모스, 발터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p.369
Benjamin describes the wax figure in the Musée Gravin as a ―Wish Image as Ruin: Eternal Fleetingness,‖ that ―No form of eternalizing is so startling as that of the ephemeral and the fashionable forms which the wax figure cabinets preserve for us. quoted in Buck-Morss (1993: 369) Buck-Morss, Susan (1991) 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 Cambridge, Mass. and London, MIT Press, Korean translation (2004),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9. 캐롤라인 험프리(Caroline Humphrey)는 샤먼의 청동 거울이 만들어내는 난반사 효과의 원리가 실재 사람이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없고 약간 왜곡된 모습으로 비추는데 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도록 설계된 것이라 주장했다. Caroline Humphrey, “Inside and Outside the Mirror: Mongolian Shamans’ Mirrors as. Instruments of Perspectivism.,” #Inner Asia# 9(2), (2007): 173-195.
10. The resonances are dispersed on the different planes of our life in the world, while the reverberations invite us to give greater depth to our own existence. In the resonance we hear the poem, in the reverberations we speak it, it is our own. The reverberations bring about a change of being. It is as though the poet’s being were our being (Bachelard, 2014: 7).
11. 매순간 현재와 과거가 통시적이라면 모든 지나간 현재들이 통시적이며 따라서 현재와 과거 전체는 늘 공존(coexistence)하기 때문이다. Deleuze says “what we call the empirical character of the presents which make us up is constituted by the relations of succession and simultaneity between them, their relations of contiguity, causality, resemblance and even opposition. […] what we live empirically as a succession of different presents from the point of view of active synthesis is also the ever-increasing coexistence of levels of the past within passive synthesis.” Gilles Deleuze and Paul Patton, #Difference and Repetition# (2001), 83.
12. 주재형,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에 대하여」, 『철학』, 129호(2016): 153.
13.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서울: 아카넷, 2005), 151.

참고 문헌
바슐라르, 가스통.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서울: 민음사, 1990.
주재형.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에 대하여」. 『철학』 129호. 2016년: 151~176.
베르그송, 앙리.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서울: 아카넷, 2005.
전상인・이종겸. 「DMZ 지역 ‘국가촌락 사업’ 연구: 철원군 유곡리 통일촌 사례를 중심으로」. 『국토계획』 제52권 제4호(2017): 27~41.
정희남. 「정부수립 이후의 한국 토지정책 60년사 소고, 1948~2008」. 『부동산연구』. 제20집 제1호(2010): 281~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