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처의 위기(Refuge(e) Crisis)1
2015년 9월,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3살짜리 아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파도에 떠밀려온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Aylan Kurdi)의 자그마한 시신이 모래사장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참혹한 모습을 담은 보도 사진 한 장은 전 세계 네티즌에게 분노와 충격을 안겨주었다. 생과 사, 정착과 이주 사이에서 희생된 이 아이의 죽음으로 전 세계인들은 광기에 가까운 도덕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 세계의 잘못으로 한 아이가 죽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등을 구호로 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곧 각국을 향한 난민법 개정 촉구로 이어졌다. 시리아 내전은 약 200만 명의 발길을 유럽으로 향하게 한 민족 대이동을 유발했다.
2017년 12월 겨울 프랑스에서 한 흑인 여성이 응급구조서비스센터에 전화해 다급한 목소리로 구급차를 요청했다. 하지만 상담원은 아프리카 이주민이었던 그 여성의 억양 때문에 구급차를 보내지 않았고, 여성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시민들 사이에서 일파만파 퍼지면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공개된 녹음파일에는 “아파서 죽을 것 같다”라고 호소하는 흑인 여성의 울부짖음이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아프다고 호소하는 흑인 여성에게 “아프면 의사에게 직접 전화해라”, “당신도 언젠간 모든 사람처럼 분명 죽어요”라고 한 상담원의 응대 내용이었다.2 인류는 생존을 위해, 또는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이주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정착한 새로운 땅에서도 또 다른 위협을 만나게 되고, 다시 한번 이주를 결정한다.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대거 탈출한 것은 2010년 참혹한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였다. 미국 정부는 ‘임시보호신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약 6만 명 아이티인들의 미국 체류를 허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자연재해나 장기적인 소요로 고통받는 나라의 국민에게 18개월간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이티 생존자들은 구조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잔해더미를 뒤집어쓴 채 미국행 긴급 수송선에 올라탔다. 하지만 환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지진이 일어난 지 몇 달 만에 미국 관료들은 공군 화물용 비행기를 아이티로 보내 미국으로 오려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해 송환될 거라는 메시지를 퍼뜨렸다.”3
최근 탈국경 이주가 폭증하면서 반이주 정책을 내세운 정치인이 득세하는 한편, 이주자들의 범죄와 혐오로 사회위기가 고조된다는 여론도 치솟고 있다. 인종 간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자 순수 혈통 체계에 대한 위협이 가중되면서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시선도 많아졌다. 최근 들어 타자에 대한 수용과 환대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장-뤽 낭시(Jean-Luc Nancy) 같은 철학자들의 시각이 담론화되고 있지만, 이주자들의 실제 삶은 여전히 불안하다.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하는 이주는 개인적인 삶의 문제를 넘어 사회공동체의 문제로 귀결된다.
최찬숙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주이다. 최찬숙의 작업은 영상, 퍼포먼스, 설치, 오브제 등을 통해 자신의 가족사와 타인의 삶을 자전적 형식으로 엮어낸다. 20대 초반 독일로 이주한 최찬숙은 한국계 아시아 여성으로서 유럽 사회에 완벽히 동화되지 못하는 한편 한국에서는 점차 잊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이방인에 대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인류는 더 안정된 삶을 위해 이동을 선택하지만, 때로는 그 선택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를 몸소 경험한 작가는 향후 수많은 질문을 본인, 그리고 타자를 향해 던지기 시작한다. 인류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동하는가? 이동은 물리적 이동만 가능한가?
기후 변화에 따라 서식지를 옮겨가는 야생식물의 종은 날로 늘어가고 있으며, 이 현상은 대륙과 대양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움직인다. 인류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에는 위성으로 철새들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촬영하고,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류의 이주 또한 특정 통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주하는 인구는 통계수치보다 더 많다. 이들은 이주하기,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타자화되어 낯설어지기가 계속 반복되는 상황에 노출된다. 최찬숙은 이론화와 데이터화가 불가능한 경계의 틈바구니에서 ‘이주’에 관한 사유를 시작한다. 이주의 중심에는 타자화된 여성의 삶이 있지만,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타자화된 세상에서 주체적 삶을 이끈다.
최찬숙은 어느 날 몇 장의 사진을 들고 일본인이었던 친할머니의 흔적을 찾아 일본으로 이동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이주했던 할머니의 과거와 풍족한 삶을 사는 자신의 현재를 교차시켜, 현재라는 네모난 천 위에 파편처럼 분절된 과거의 시간성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했다. 먼 타국 땅에서 굉장히 친밀했던 할머니의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국가라는 굳건한 장벽과 그 장벽 속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결국 이주를 통해 스스로 타자화되고 고립되지만, 국가라는 경계가 없었다면 인종차별주의적, 반잡종문화주의적, 계급주의적, 신식민주의적 관점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대이동으로 인해 이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같은 인식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소니아 샤(Sonia Shah)의 주장이 많은 이론가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녀는 난민과 이주자를 새로운 이웃이 아닌 침입자로 낙인찍는 몇몇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들며, 인류는 원래 정착보다는 강한 이주 본능을 가졌고, 모든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했으며4, 더 나아가 원래 인류의 문화는 잡종 문화였다는 논지를 펼친다. 최찬숙의 작업에서도 이주에 대한 소니아 샤의 인류애적 포용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정착과 이주의 알레고리
최찬숙은 특정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를 긴 호흡으로 치밀하게 연구한다. 최찬숙의 신작은 항상 그 이전 작업에서 미해결로 남았던 부분들을 소환한다. 그래서 각각 다른 주제를 담은 작품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강렬한 알레고리의 틀 속에 개인과 역사, 기억과 망각, 정신과 몸의 문제를 가두는 것이다. 최찬숙이 재구성한 세계를 따라 알레고리를 추적하다 보면, 작품 해석에 일정한 방향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각각의 주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요소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예컨대, <FOR GOTT EN>(2012)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 정신적 이주를 다루지만, 이주 여성들의 삶, 망각된 기억, 얼굴의 역사 등이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며 등장한다. 군사경계지역이라는 장소성을 부각시킨 <양지리>(2018)은 그곳에서 거주하는 할머니의 삶을 자전적 소설의 형식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최찬숙은 양지리 마을에서 주변인물에 머물지 않고 고단한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해 그 일부가 된다. 또한 최찬숙은 양지리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 내내 이곳에 정착해 살아온 할머니들을 법과 제도로 규정된 땅의 소유 문제에 대입시킨다. 이를 위해 법적 분쟁의 소지가 있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몸에 관한 이야기와 국가가 규정한 제도 밖에서 기본 자격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린다. 언젠가는 소유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는 양지리 마을의 할머니들은 정착과 이주의 경계라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최찬숙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불안한 뿌리를 가진 이들의 삶에서 정착과 이주를 반복해온 자신의 삶을 포착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일까. 최찬숙은 타인의 삶을 곧 자신의 삶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이주와 정착의 역사를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전개한다. 타국에서 타자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과거로부터 복구하고 싶었던 작가의 욕구는 시리즈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차츰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에는 망망대해 같았던 낯선 시간성에 홀로 서 있었다면, 이제는 수많은 이주 집단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 있다. 최찬숙은 이번에 발표한 <qbit to adam>(2021)이 완성되기까지 이주, 여성, 땅을 주제로 각각 <약속의 땅>(2010)5, <FOR GOTT EN>, <양지리>, <밋찌나>(2019)를 순차적으로 제작했다. 이렇게 완결된 각각의 파편들은 결국 최초의 작업으로 되돌아간다.
독일에서 꽤 오랜 시간 외국인(‘들이닥친 자’)6으로 살았던 최찬숙에게 이주와 여성의 삶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구 대상이었고, 그는 그 연구를 계속 확장시켰다. 주체와 타자의 문제를 떠나 외국인은 곧 “‘이곳 사람이 아니다’라는 진술을 가능케 하고, 그 진술은 타자를 사회라는 공간으로부터 추방하고 거리를 유지하라는 명령 안에 그를 가두어, 타자를 그 존재 자체로 긍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7 이주를 하면 누구나 특정 장소에 정착한다. 그 정착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구와 함께. 이렇듯, 보편적으로 누구나 외국인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강한 이주 본능을 가진 인류에게 안정된 정착은 허락되지 않는다. 전쟁으로 떠밀려온 사람들, 식민치하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 생사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 영원한 이방인들, 그리고 영원한 타자들. 최찬숙은 이러한 상황에서 물리적 공간을 소유하고 정착된 삶을 산다 해도 외국인,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심리적 박탈감을 떨칠 수 없는 타지 생활의 고충과 쓸쓸함에 집중한다.
최찬숙에게 있어 ‘이주의 문제’는 단지 물리적 공간의 이동, 곧 국경과 국경 간의 이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최찬숙은 “2012년 쿤스트라움 할레 14의 지원 대상에 선정되어 라이프치히 교구 출신의 여성 여섯 명을 만나 오늘날의 신과 믿음, 종교 그리고 영성의 지위에 대한 조사·연구를 현지에서 수행했다. 작가가 만난 여성은 모두 60~90세 사이의 라이프치히 출신으로서, 1949년부터 1989년까지 종교의 자유를 억압했던 동독 체제하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고하게 지켜낸 이들이었다. 이렇게 최찬숙은 예술적 작업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 깃든 리서치 프로젝트 <FOR GOTT EN>을 시작했다.”8 이 전시에는 여섯 명의 여성이 신과 믿음, 기억과 망각 사이의 삶을 반추하는 인터뷰 내용이 영상으로 설치되었다. 이 작업을 관통하는 알레고리는 개인의 역사적 경험과 종교적 관점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성찰이다. 이 작업에도 <약속의 땅>과 마찬가지로 작업의 다른 구간으로 이동하는 장치가 설치되었다.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특수 제작한 가마는 이동수단이다. 이 가마는 여성들이 살아온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망각된 과거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 올린다. 가마에는 “당신의 눈은 당신의 몸/혼에 난 창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여정으로의 초대이자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짧은 여행이다. 이런 기억들은 가마를 타고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진다. 최찬숙의 카메라는 기억의 과정과 여성들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나오는 영상을 보고 보인 그들의 반응을 기록했다.”9 이렇듯 최찬숙은 할머니들이 과거와 소통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줌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내밀한 과거를 통해 현재의 삶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
“최찬숙이 만들어낸 이동형 시스템은 노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은 세계이고, 그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작가의 도움 없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친절한 환대, 여러 번의 자택 방문, 소박하지만 배려 넘치는 도움, 헌신하고 감사하는 태도 등 작가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노인들은 거리감과 경계심을 풀 수 있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외국인이며 외국인처럼 생긴 한국인이 발산하는 인상 때문이었다. 악센트가 섞인 독일어를 구사하지만 동독의 작센 지역과는 아주 먼 곳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한국인 말이다.”10
이 프로젝트의 디렉터였던 프랑크 모츠(Frank Motz)는 최찬숙이 라이프치히에 수개월 머물면서 <FOR GOTT EN>을 제작한 과정과 태도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서술했다. 최찬숙이 외국인으로서 낯선 땅에서 타인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진행한 작업 과정에는 이미 객관화된 타자와의 경계가 허물어져 있다. 최찬숙의 이러한 작업 방식은 <양지리>을 제작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최찬숙은 5개월간 양지리 마을에서 그곳의 할머니들과 가족처럼 지내면서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 어쩌면 타자에 대한 최찬숙의 따듯한 관심이 그들의 고단했던 삶의 여정에 큰 위로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양지리에서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땅을 밟으며 살게 되었어요. 집 나서면 바로 흙, 땅을 밟아야 하는 곳이었죠. 어느 날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90세가 넘으셨죠, 그 할머님께서 지나가다가 툭 한마디 하시는 거에요. 어제 늦게까지 안 자던데… 그 집 살다 먼저 간 친구가 보고 싶어서, 잠시 걸터앉아 있다가 왔어…. 그러시더라구요. …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땅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안정된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양지리에서의 경험과 그곳의 할머님들을 만나면서, 땅과 몸, 그리고 다른 방식의 소유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1
최찬숙은 강원도 철원 민북마을(Propaganda Village)에서 5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아왔던 할머니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북군사경계지역인 양지리 마을에는 1968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이들이 터전을 꾸리도록 정부가 땅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땅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최찬숙은 할머니들과 인터뷰하면서 이 마을의 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지뢰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토지는 우리 소유로 된 것이 아니라서, 땅 주인이 나타나면 꼼짝없이 쫓겨나야 했던 이야기” 및 “내 땅이 아니라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늘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 묻은 작물들을 털어내시며 풀풀 날리던 흙먼지처럼 셀 수도 없이 반복하여 들려주시는 고생담들” 말이다. 최찬숙은 양지리 마을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며,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는 방식과 땅에 정착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땅은 왜 당신의 것인가?”
정착과 이주의 경계에서 땅, 땅을 소유한다는 의미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복음』 5장 5절).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기』 3장 9절)
“창조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땅을 가리킬 때 아레츠(aretz) 대신에 아다마(adamah: 흙)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만들어진 재료를 뜻하는 아다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인간의 이름(아담)이 되었다. 흙은 동산의 속성을 지니고,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동산에 두사 그 땅을 다스리며 돌보게 하셨다.(『창세기』 2장 15절)”12 거룩한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받은 땅에서 어쩌면 인간의 몸과 땅은 하나였을 것이다. 최찬숙의 <qbit to adam>의 전시 공간은 세 개의 대형 스크린과 구릿빛 바닥 재질로 가득 채워져 있다. 관객은 작가가 설정해 놓은 땅의 질감 안에서 땅과 몸에 대한 서사를 읽어나간다. 최찬숙은 여러 해 동안 땅의 개념에 대해 연구했다. 땅의 경계는 누가 정하게 되었는지, 땅의 소유 개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물질로서의 땅이 앞으로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에 대해서. 그녀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사회, 역사, 종교의 영역에서 땅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땅, 무덤, 몸, 미라가 영상과 텍스트로 흩어지기도 모아지기도 하면서 한 덩어리의 알레고리를 탄생시킨다.
최찬숙은 흙으로 이루어진 땅과 인간 몸의 근원에 천착했고, 그 근원이 초월성으로 치환됨을 깨닫는다. 인간에게 숙명과도 같은 죽음은 인간을 다시 땅으로 돌려보낸다. 최초로 땅이 언급된 성경 속의 ‘땅’ 개념부터 현대사회의 ‘땅’ 개념에 이르기까지 땅의 역사와 범주는 매우 광범위하다. 땅과 몸의 경계가 사라지는 곳. 최찬숙은 23시간의 비행 끝에 칠레의 칼라마 도시와 가까운 아타카마 사막을 찾았다. “1899년 칠레 북부에 위치한 고대 광산에서 미라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긴 시간 몸속으로 스며든 초록빛 구리로 인해 그의 몸은 광물이 되었다. 코퍼맨(Copper Man). 천천히 그의 몸을 들여다보면 더 이상 몸과 땅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다.”13 이 작업은 땅과 몸을 연결한다는 시나리오에서 출발했다. 구릿빛 재질로 채워진 전시장 바닥은 땅과 몸을 하나로 잇기 위한 매개영역이다. 구릿빛 광물을 뒤집어쓰고 땅에서 나온 코퍼맨을 상징하기도 한다.
땅
최찬숙은 <약속의 땅>, <양지리>, <블랙에어>(2019)를 통해 이주, 이동, 땅과 땅의 소유 개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사유의 흐름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 계속 이어졌다. 《2021년 올해의 작가상 2021》 전시를 위해 완성한 <qbit to adam>은 최찬숙이 앞서 제시했던 주요 키워드들을 통합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최초의 땅에서 광야로 추방당한 아담. 사회,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떠밀려 난 사람들. 땅에서 평생 노동하면서도 그 권리를 찾지 못하는 노동자. 자본주의사회의 경제 논리로 사고 팔리는 땅들. 거대한 자연이 개인의 소유물로 탈바꿈되는 순간들. 그리고 여전히 정착할 땅을 찾지 못하는 이주민들. 최찬숙에게 땅은 떠도는 몸과 영혼의 안식처이자 타인을 포용하고 환대하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난민, 노동자, 이주자를 양산하는 사회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은 사고 팔수도 없고,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마치 땅 위에 봉긋 서 있는 무덤처럼 말이다. 이 사유의 끝에 다다르면 몸과 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깨닫는다. 마치 창세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욕망이 거세된 땅의 질감과 촉감이 우리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최찬숙은 질문한다.
몸의 경계와 땅의 경계는 어떻게 다른가?
죽은 자의 무덤을 내려다볼 때 무엇이 보이는가?
몸
전시장에 설치된 3개의 대형 스크린에는 살아 숨쉬는 것 같은 땅의 질감이 상영된다. 그리고 이 땅을 배경으로 몸을 상징하는 살구색의 살 조각들이 회전한다. 땅의 촉감에 대한 묘사와 함께 스크린에는 구리 조각도 자주 등장한다. 영상의 오브제인 이 살 조각과 구리 조각은 몸과 땅의 분리 혹은 하나됨을 의미한다. 구리 재질로 마감된 전시장 바닥과 영상 속의 구리 조각은 상호 작용하며 관객의 몸을 둘러싼다. 관객은 땅과 몸을 이어주는 구리빛 바닥에 몸을 맡긴 채, 땅과 그 땅에서 밀려난 자들의 고단한 삶의 여정에 동참한다. 그리고 최찬숙은 다시 질문한다.
땅은 신체와 언제부터 분리되었는가?
데이터
최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컴퓨터 데이터로 구현되는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에 진입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뿐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친다. 땅의 개념과 그 소유 또한 마찬가지다. 가상현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것은 인류의 땅의 역사가 그랬듯이 공동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점차 공동소유의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가상의 세계에서도 현실의 땅이 겪었던 일련의 과정들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가상의 플랫폼에서 땅을 사고, 아바타를 정성스럽게 꾸민다. 현실의 나는 곧 아바타가 되고, 그 아바타를 통해 가상 세계에 가꾸어놓은 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사람(아바타)을 만난다. 이렇듯 현실 세계의 시공간은 이제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 외에도 그곳에서 집을 사고, 꾸미고, 친구들을 만난다. 땅의 개념이 변화함에 따라 인류가 개입하여 관리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자아는 몸이 사라진 신체, 즉 땅과의 연결이 끊어진 채 아바타라는 데이터로 변환된 자아이다.
토지의 이동, 가상의 땅 쟁탈전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는 현실의 자아와 아바타가 한 시공간에서 살아간다. 오랫동안 구직 활동에 실패한 애나 앨버라도는 넥스트 디멘션(Next Dimension)의 윈도를 열고 평소에 즐기던 게임인 ‘이리듐 시대’를 시작한다. “교두보는 붐볐지만 애나의 아바타는 모두가 탐내는 강력한 아이템인 자개 갑옷을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플레이어들에게서 자신들의 공격 팀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애나의 팀은 불타오르는 차량의 연기로 자욱한 전투 지대를 가로질러 사마귀들의 거점으로 가, 한 시간 동안 소탕전을 벌인다. 현재의 기분에 딱 들어맞는 미션이었다.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는 도전적이다.”14 현실 세계에서 애나는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지만, ‘이리듐 시대’ 속 애나의 아바타는 누구나 찾는 매력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데이터이다. 그리고 애나는 곧바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인터넷 플랫폼인 데이터 어스(Data Earth)에 접속한다.
“접속하자 윈도는 그녀의 마지막 로그아웃 지점으로 줌인한다. 거대한 절벽 표면을 뚫어 만든 댄스클럽이다. 데이터 어스에도 독자적인 게임 대륙이 있지만,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애나는 언제나 사교 대륙에서 시간을 보낸다. 애나의 아바타는 아직도 지난번 방문 때 입었던 파티복 차림이다. 그녀는 좀 더 얌전한 옷으로 갈아입고 친구 로빈의 집으로 가는 포털을 연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로빈의 집의 가상 거실에 와 있다. 너비 1마일의 반원형 폭포 위에 떠 있는 거주용 비행선이다. 아바타끼리 포옹을 나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15
가상세계가 등장하면서 현실 세계에서처럼 감정을 투사하는 아바타가 등장했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NFT와 메타버스가 등장하면서 가상의 영역에서도 현실과 똑같이 땅, 집, 나무, 정원, 차, 옷, 가방 등의 소비가 이루어진다. 테드 창의 소설에서도 등장하듯이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루어지고, 그곳에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편리하게 할 수 있다. 이젠 물리적 공간에 놓인 몸뿐 아니라 가상공간을 딛고 서 있는 아바타의 존재도 살펴야 한다. 어쩌면 신체와 분리된 듯한 존재이지만, 우리의 영혼과 마음은 물질 없는 데이터에 더 다가가 있을지 모른다. 땅의 소유 개념이 이젠 가상 영역에서의 소유 개념으로 전환되고, 나의 신체는 아바타로 대체되었다. 넓고 황량한 대지 위에 서 있는 나와 광활한 우주 벌판 같은 무한증식 세계에서 부유하는 나의 모습을 추스른다. 그리고 내 몸을 움직여본다. 구리 질감의 바닥 위에 서서 땅의 영상을 바라보며, 땅과 몸의 강한 연결을 감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