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은 오랜 타국 생활을 경험해야 했던 자신의 문제 이자 현대사회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이주의 차원 혹은 그 문제설정이다. 긴 시간에 걸쳐 유동적인 삶을 살아와야 했던 인류에게 있어 이주의 흐름 자체가 그다 지 새로울 것은 없겠지만 작가는 동시대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이주, 그리고 이러한 이주의 차원을 다양한 맥락에서 전례 없이 확장시키고 있는 현대의 다 양한 기술과 장치들에 대해 주목한다. 이주의 장치들에 관한 묵직하면서 실험적인 문제 제기가 전시의 전체적인 화두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부단히 이 동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주하고 있긴 하지만 좀처럼 그 근본적인 문제들에 생각해보 지 않을 만큼 이동, 이주의 차원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차원으로 관성화 되고 있 다. 이주의 삶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결국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곧 유토피아에 다름 아닌, 약속의 땅을 위한 것들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보다 나은 삶을 위 해 이주하지만 현실은 정말 그러할까? 그리고 이주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단지 내 몸이, 내 삶이 다른 곳으로 거하는 것만이 이주의 전부일까? 이러한 꼬리를 물고 이어 지는 의문의 타래에서 작가는 이주가 단지 물리적인 차원 뿐 아니라 정신적 차원을 가 지고 있고 이 두 가지 차원의 이주 기술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그 지점을 주시한다. 단 지 물리적인 육신의 이동만으로는 이주의 삶, 곧 진정한 이주가 가능하지 않음을 현실 적으로 종종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물리적인 이주 없는 정신적 이주의 경우 도 의미심장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각종 미디어, 테크놀로지 장치를 통한 정신적 이 주의 차원이 그런 경우들일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주목하는 것이 정신적 이주의 차원 인데, 이동수단의 비약적인 발전이나 유동적인 사회적 체제의 변화로 인해 몸의 이주, 곧 물리적 이주는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일상화되고 있지만, 정신적 이주의 차원은 그 중요한 의미에 대한 인식이나 심도 있는 공론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그렇기에
이러한 정신적 이주의 개념 설정 자체가 동시대적인 이슈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다양한 미디어, 테크놀로지, 장치들을 통한 정신적 이주(장치)의 차원의 경우 그 현실적인 파급효과나 중요성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그런 상황들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 미디어 장치를 주요 기반으로 하는 작가로서 문제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이러한 정신적 이주 기술의 문제설정을 위해 이번 전시에서 (물리적 이주 기술 과의 대비를 통해) 실험하는 장이 흥미롭게도 폭스바겐사의 공장 투어 프로그램인, 아 우토슈타트(Autostadt)의 첨단 시스템이다. 현대적 이동수단의 총아라 할 수 있는 글로 벌 자동차 회사, 그리고 자동차 문화의 최첨단 시스템을 자랑하고 있는 이 거대한 테마 파크, 프로그램은 작가가 고민하는 두 갈래의 이주의 문제들을 다각적으로 시사한다. “이곳은 단순한 공장이 아닙니다. 그 이상 이죠. 우리는 거의 완벽에 도달했습니다.” 물 리적 이동 기술을 넘어 정신적 이주마저 장담하면서, 동시대 테크놀로지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주는 아우토슈타트 역시 마찬가지로 커다란 하나의 기술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의 땅, 유토피아나 파라다이스를 향한 기술 장치, 테크놀로지의 현실적 총 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저 대규모의 상업적인 이윤을 위한 마케팅의 차원에 서 기술만능주의 혹은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를 경험케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러한 물리적 이동 기술의 허점 혹은 공백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물리적 이동과 정신적 이동과의 충돌, 균형을 실험하기 위해, 정신적 이주 장치라 할 수 있는 빛과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뇌의 활동을 조절할 수 있는 광유전학(optogenetics)의 미래 기술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광유전학의 한 예시로 이번전시에서 옵토로돕신 (Optorhodopsins)을 제안하는데, 이는 빛의 전기적 자극을 통하여 기억을 이식할 수 있는 가상장치로 빛을 통한 기억 이주 장치이자, 통합적으로 설계된 이미지 프로그램으 로, 아우토슈타트가 제시하는 물리적 이주 장치가 아닌, 가상의 정신적 이주 장치이자, 이번 전시의 주요 개념적 제안이다.
옵토르돕신은 빛으로 빛을 지우는, 다시 말해 빛(감광원)으로 빛(약광원, 프로젝션으로 보여주는 이미지)을 지우는 방식을 통해 정신적 이주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인위적인 빛을 통해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기억을 이동시키는 것인데, 이런 면에서 정신적 이주 를 실험적으로 가능케 한다. 빛으로 기억을 이동하게 하는 기술, 다시 말해 광유전학의 기술을 통해 기억이 빛을 통해 교환되도록 함으로써 그 결과라 할 수 있는 정신적 이 동의 목적지에 대해 사유하도록 한 것이다. 전시는 아우토슈타트 프로그램의 동선을 따 라 이동하면서 폭스바겐이 제시하는 첨단 테크놀로지의 장밋빛 세상을 가이드 멘트와 텍스트를 통해 마주하게 하지만 전시장 곳곳의 화면을 비추는 것은 우리의 지극히 일 상적인 풍경들이고, 이 기억의 이미지들이 점차 옵토르돕신의 작동인, 다른 빛의 움직 임들로 지워진다. 특이한 점은 이들 일상의 풍경들이 극장 모양의 구조물 안에서 상영 된다는 점인데, 우리의 일상적 기억의 풍경들로 극장식 건축 구조를 형상화시킨 것이라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구조들로 투사된 영상들이 또 다른 빛에 의해 지워지면 서 결과적으로 텅빈 공간 속의 기하학 구조물과 빛만 남게 된다. 특히 유럽최대 지상낙 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트로피컬 아일랜드의 화려한 인공낙원의 이미지와 로마 바티칸 베드로 성당 사이로 떨어지는 빛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눈길을 끄는데, 이들 거 대한 테마파크 유흥 공간과 종교적 건축물의 이미지들이 다시 작가에 의해 고안된 빛 장치들에 의해 지워지고, 이 순간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이드 프로그램의 소비자 참 여 멘트와 겹쳐지게 된다. 지극히 강렬한 대비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프로그 램이 처음 시작되는 지점에서 마주하는 오래된 SF 소설의 아내를 잃고 외계 생명체를 만나 아내와의 기억을 가지고 섬으로 이주한다는 Martin Sergei의 "Silence Space"의 의미도 심상치 않기만 하다. 이런 식으로 전시공간의 영상들은 물론 오브제, 구조들, 동선 하나하나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계획이 의뭉스러우면서도 깊은 공명을 자아낸다. 여러 차원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현대 이동수단의 절정을 보여주는 글로벌 다국적 자 동차 브랜드의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주입하는 물리적 이주의 차원과 우리의 일상의 기 억이 다른 기억들로 대체되는 정신적 이주의 차원, 그리고 다시 동시대 테크노피아 상 업주의 이데올로기와 성스러운 종교적 차원 등이 혼돈스럽게 충돌하면서 변모되는 과 정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이어 건축, 공간학적으로 대안공간 루프의 정 중심점이자 지상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곳의 중심에 위치한 지하 공간의 중심에 위치한 헤트라이트가 비추는 지하층이 이 전시의 백미로 자리한다. 인류의 숱한 기억의 소산들이라 할 수 있 는 지식과 텍스트들, 그 장구한 역사들이 강력한 빛에 의해 순차적으로 지워지고 비워 지면서 순간 텅 빈 공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우토슈타드 프로그램 안내의 멘트가 끝나면서 말이다. 화려한 기술 유토피아의 약속이 결국은 마케팅적 속삭임에 다름 아니 라는 것, 그러한 기술의 환상의 끝에서 남는 것이 결국은 빈공간이라는 점이 의미심장 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물리적 이동기술의 약속 자체가 정신적 이주기술마저 담보하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은 물론, 작가가 제안하는 정신적 이주의 차원, 곧 이번 전시의 화 두로 던져진 ‘약속의 땅’이 결국은 텅 빈 공간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1층 전 시공간에서 간헐적으로 마주한 텅 빈 공간 속의 기하학적 구조물과 빛이, 다시 지상의 물리적 이주가 끝나는 지점이자 더 심화된 층위에서 더 큰 깊이 있는 울림으로 공명하 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건축적 공간 구조의 측면에서도 의미심장한 고 려가 돋보인다. 전시의 바탕이 되는 대안공간 루프의 장소 특정적인 면모들을 잘 살렸 을 뿐만 아니라 관람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주하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인터렉티브 한 환경 구축을 통한 일종의 연극적 관람의 형태도 전시의 의미효과를 배가시키고 있 기 때문이다.
이주의 장치들
작가가 제안하는 이번 전시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장치, 이를테면 이주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 정신을 이동하게 하는 것들, 단지 물리적인 이주만이 아닌 정신적 이주까지 가능하게 하는 그런 테크놀로지, 장치의 어떤 가능성을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가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만은 아니다. 물 론 이번 전시는 갖가지 기계, 미디어, 테크놀로지로 복잡하게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계 획적이고 체계적인 공간 디자인은 물론 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작업들이 서로 유기적 으로 연결되면서 일정한 동선의 흐름을 만들고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오브제, 영상과 사운드들은 어떤 것을 나타나게 만드는 일종의 도구일 뿐 이 글에서 설정하고자 하는 장치 개념은 아니다. 장치는 기본적으로 어떤 것이 사라 지게 만든다. 비가시적인 작동으로 무언가 다른 것들에 관계하고 영향을 미치는 개념이 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가 전체적으로 장치일 수 있는 것은 전시의 일관된 작동이 보이 는 그대로의 것들을 넘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사유하고, 생성하게 하기 때문인데 앞선 논의처럼 그 중심 화두가 이주 장치의 가능성을 실험케 하는 작동이라 할 수 있 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각각의 기계, 기술들의 일반적인 역할과 기능 자체에 대한 메 타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 미적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치란 대체 무엇이며, 이주의 장치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푸코의 논의 를 빌어 말하자면 장치(dispositif, apparatus)란 개인을 변형시키고 훈육시키는 것, 곧 우리의 존재를 가공하고 변형하고 관리하고 통치하는 외부적 활동 모두를 의미한다. 곧 자연적인 존재를 특정한 주체로 만드는 것이다. 주체화의 장치인 것이다. 이주의 장 치도 그런 면에서 물리적인 차원만이 아닌 정신의 차원마저 함축해야 한다. 주체 형성 의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는 푸코의 논의에 더해 아감벤은 이들 장치 개념을 더욱 확 장시킨다. ‘생명체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 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 부를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 장치 란 무엇인가, 양창렬 옮김, 난장, 33쪽) 아감벤의 주장은 장치론에 있어 푸코의 논의보 다 더 큰 확장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포함한 인간에 작동하는 세상 의 모든 것들이 장치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동시대 사회는 장치의 무한한 증 가만큼이나 주체화 과정 또한 무한히 증식되고 다양한 주체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 한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 확장된 장치를 통해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장치가 행하는 탈주체화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단계어서 장치는 주체화보다 탈주체화를 가속시 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장치는 암묵적으로 탈주체화를 전제한다. 주체의 생산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탈주체화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을 통해 장치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 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탈주체화를 장치들을 이른바 세속화(to profane), 공통화 (common use)하는 차원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장치들을 세속화하는 문제, 즉 장치들 안에 포획되고 분리됐던 것을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돌리는 문제는 그 만큼 더욱더 긴급한 사안이다. 이 문제를 짊어진 자들이 주체화 과정이나 장치들에 개 입할 수 있게 되고, ‘통치할 수 없는 것’에 빛을 비추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 문제는 올바르게 제기될 것이다. 이 ‘통치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시작이기도 하 며 소실점이기도 하다.” (아감벤, 같은 책, 48쪽) 이는 일종의 역장치(counterapparatus)이기도 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논점이 발생한다. 통치할 수 없는 것에 빛을 비추게 된다는 구절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고안한 정신적 이주의 장치는 미래 의 가상장치이자 그 가능성이며, 동시에 이러한 가능성의 검토를 위해 현대 문명이 제 시하는 장밋빛 기술 지상주의의 한갓 물리적 이주 장치의 한계, 혹은 상업적 마케팅에 불과한 현실의 상황을 대비시킴으로써 인식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물리적 이주 장치의 허구는 쉽게 폭로되는데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이 정신적 이주 장치가 일상의 현실 이미 지를 빛으로 지우면서 만들어낸 어떤 공백들이다. 동시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관람객은 전시 공간에서 일상을 담아낸 빛 이미지가 중첩된 대상들을 감상하게 된다. 현대 테크놀로지가 말하는, 혹은 강요하는 물리적 이동, 이주의 장치들이다. 우리는 그 렇게 부유하듯 세상을 떠도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물리적 이주의 차원에 다시 정신적 이주의 차원, 그 가능성을 덧입힌다. 그 이미지들에 다시 또 다른 빛을 투 사함으로써 일종의 공백, 무화된 공간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동 시대 첨단 테크놀로지가 토해내는 이주를 강요하는 마케팅의 장밋빛 미래만이 허구적 으로 웅성거린다. 이 조차 종료되고 남은 것은 그저 빈 공간을 확인하게 되는 경험이야 말로 우리 자신이 이러한 (이주)장치의 단순한 구성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의 가능성 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닐까. 탈주체화의 가능성 말이다. 장치들에 의해 단순히 수동적 으로 구성되는 그런 주체화의 계기만이 아니라 다른 주체화의 가능성을 남기게 하는 어떤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시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빛을 빛으로 무화시키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공백을 만드는 것은 가시성에 대한 역가시성의 작동이며, 장치 권력의 작동을 빛으로 무화시키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온갖 만연한 미디어의 포진으로 물리적인 이동은 물론 정신적 이주마저 재촉케 하는 장치들이 점차 정교해지고, 촘 촘해지면서 광범위해지고 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몸을, 정신을 이동케 하는 그러한 상황을 직시하면서 작가는 단순히 장치들에 의해 전일적으로 형성되는 그러한 주체가 아니라 그러한 가능성을 다시 되묻는 어떤 탈주체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흥미를 끄는 지점은 작가가 어떤 적극적이고 대안적인 탈주체화를 설정 했다기보다는 광범위한 이주의 장치들 속에서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주체가 아닐 수 있 는 가능성, 이를테면 이주 장치의 간극, 틈, 구멍, 공백 같은 것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물리적 이주 장치와 대비되는 정신적 이주 장치의 불일치, 혹은 그 관계에 대한 의문, 그리고 (정신적) 이주 장치가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백의 과정일 수 있음을 드러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온갖 다양한 이주 장치들 속에서 부단히 다른 삶으 로 이동을 거듭해야 하는 그런 일방적인 주체가 아닌, 그러한 장치들이 동시에 만들어 내는 간극 속에서 또 다른 존재의 가능성으로 자리할 주체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 은 빛 이미지를 다시 빛으로 중첩시키면서, 장치의 작동에 대응하는 또 다른 장치의 작 동으로 결국은 남게 되는 텅 빈 존재에 대한 확인은 장치의 일방적으로 구속되는 주체 가 아닌 다른 주체의 가능성을 여는 것인 동시에, 작가가 제안하는 장치들이 일종의 메 타 장치, 혹은 미학적 장치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빈 공백의 확인은 세상의 온갖 (이주) 장치들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인 동시에 그러한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장치들이 갖 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잠재적 변화가능성 혹은 역가능성이다. 촘촘하게, 매끄럽고, 부드 럽게 세상을 뒤덮고 있는 장치들, 그리고 그러한 장치들에 의해 형성될 수밖에 없는 일 방적인 주체화의 과정 속에서 이들 미세한 구멍을 확인하는 것은 새로운 혹은 또 다른 주체화의 가능성에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도구와 장치들의 구분에 대해 말한 것처럼 오늘날 도구들 또한 다양한 예술의 구 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확장되고 있다. 단순히 기술적이고 기계적인 역할, 기능만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을 조정하고, 지배하는, 혹은 훈육하는 장치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장치 개념을 이해하고, 동시대 사회와 일상 속에 숨겨진 장치의 작동들과 그 과정을 들추어내는 작업, 혹은 탈장치적인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험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작가가 이번 전시 에서 제기하는 정신적 이주 장치의 가능성도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를 둘러싼, 저 수많은 이주 장치들이 갖고 있는, 혹은 우리의 정신마저 통제, 지배, 조정케 하는 그 (허구적인) 과정을 전시를 통해 경험케 하고, 도 다른 주체화의 잠재적인 가능 성을 실험하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주의 장치들이 약속하는 땅 은 어디에 자리하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종국에 마주하게 되는 저 빈 공간, 비어 있 음의 순간들 자체가 혹은 역설적으로 약속의 땅은 아니었을까? 이는 약속의 땅이 물리 적 이주 장치의 작동에서 확인하게 되는 비판적인 의미들로 인해 단순히 없음을 의미 하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그렇게 비어 있음으로 존재하는 공간, 곧 없기 때문에 있(을 수밖에 없)는 어떤 역설의 공간일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가 실험하 는 정신적 이주의 장치들은 미래의 가상의 기술이기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저 하나 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그 조차 빈 공백으로 지워진 체로 가시화되는 것들이 라면, 그 없음 자체가 갖고 있는 숱한 있음의 가능성이야 말로 우리가 약속해야 할 미 래의 공간, 앞으로 도래할 앞으로의 정신적 이주의 가능성 자체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동안의 인류가 구축한 지식 시스템과는 다른, 혹은 새로운 지반에서 작동하는, 그런 정신적 이주, 구축의 가능성을 행해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건 우리의 이주는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향해(for the better life) 자리해야 할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약속의 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실험 중인 하나의 가능성, 문제설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아직은 도래하지 않을 그런 이주의 개념(과 장치들)에 대한 의미심장하고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