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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지 미술   

_ <큐빗 투 아담>에 담긴 최찬숙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김신식
독립연구자
『다소 곤란한 감정』 등을 썼다.
인스타그램에서 풀죽은 문화예술 작업자를 독려하며 살아간다.



최찬숙의 방법론이 충분히 이야기돼왔는가

부끄러운 고백부터 하련다. 나 같은 사회과학 기반의 평론가는 미술을 논할 때 못된 습성이 있다. 이를테면 최찬숙 작가의 작품은 ‘이주’라는 화두 아래 줄곧 소개돼왔다. 작품을 감상한 사회과학자 아무개는 작가가 이주를 어떻게 보여주는지 그 방법에 주목하는 대신, 작가의 작품을 재료 삼아 이주의 사회학적 의미를 설파하는 글로 분량을 채운다. 고로 이 리뷰는 앞서 언급한 습성에서 이주하려는 글쓰기이며, 무엇보다 근작 <큐빗 투 아담qbit to adam>에 깃든 최찬숙 작가의 방법론에 대한 안내서다.



‘양자적 인식론자’ 되기

우선 나는 <큐빗 투 아담>을 관람하고 나서 왜 작가가 양자역학을 가져왔을까 생각했다. 가져왔다는 표현을 부러 적어본 까닭은 작가가 양자역학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만 차용해 작업한 건 아닌지 처음엔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큐빗 투 아담>이 나오는 데 가교가 되어준 <블랙 에어Black Air>(2019), <중첩superposition>(2020)을 접하면서 의심이 가셨다. 강조해두자면 최찬숙의 작품에서 양자역학은 방법론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고 물리학 이론을 빽빽하게 들이밀어 작품의 미적 특색을 망가뜨리고 싶진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찬숙은 <큐빗 투 아담>을 만들면서 ‘양자적 인식론자quantum epistemologist’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론물리학자 리 스몰린Lee Smolin의 정의를 참고하자면 양자적 인식론자는 양자역학에 관한 지식을 물리학 영역에 가둬놓지 않은 채, 세상을 읽어내는 데 적용하는 사람이다.



<큐빗 투 아담>: 최찬숙의 중첩 3부작, 그 결정판

작품에 가닿기 위해 관객인 우리도 양자적 인식론자가 될 채비를 갖춰보자. 양자역학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법칙이 ‘중첩’이다. 교양 수준의 양자역학을 조금이라도 건드려본 사람은 알다시피 중첩은 한 대상 내엔 A라는 상태 또는 B라는 상태가 공존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최찬숙 작가는 땅을 중첩의 관점으로 조망하면서 중첩의 예술적 허용을 꾀한다. 즉 최찬숙이 <큐빗 투 아담>에서 지향하는 땅은 소유된 상태 또는 소유되지 않은 상태가 중첩된 픽션의 지대다. <블랙 에어> <중첩> <큐빗 투 아담>까지 중첩을 통해 땅의 문제를 곱씹어온 최찬숙의 픽션을 ‘중첩 3부작’이라 이름 붙인다면, <큐빗 투 아담>은 중첩 3부작의 결정판이자 이전 작품의 확장판이다.

픽션을 추동하는 땅이자 중첩 3부작의 주 무대인 칠레 아타카마 사막. 최찬숙은 구글 어스를 켜 땅 아래로 채굴이 행해져온 추키카마타 구리광산, 하늘 위로 향하며 우주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는 망원경 집합체인 알마ALMA가 아타카마 사막에 있음을 주목한다. 영상에선 두 곳이 거대한 두 점으로 겹쳐지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그리하여 <큐빗 투 아담>에서 아타카마 사막은 하늘과 땅의 경계가 불확실한 곳으로 설정된다. 이는 최찬숙이 인간의 소유욕에 땅이 복속된 상태와 인간의 소유욕에서 땅이 탈출하는 상태가 서로 얽힌 땅을 상상하며, 땅의 새 형상을 선보이는 시발점이다.

관련하여 중첩에 관한 또 다른 법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자역학은 중첩 상태에 있는 대상이 인간의 눈에 관측되기 시작하면 대상을 이루는 A 상태 또는 B 상태 중 하나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를 대상의 ‘고유 상태’가 나타난다고 부른다. 최찬숙의 작업으로 돌아가본다. 양자적 인식론자가 된 어느 시각예술가의 눈엔 인류가 땅을 본 뒤부터 땅의 중첩 상태는 파괴된 셈이다. 땅을 소유의 눈으로 바라본 채 자기 생존의 가능성을 밀어붙여온 인간은 땅의 중첩 상태를 붕괴시키고 땅의 다른 존재 가능성을 묵살해버리는 역사를 주도해왔다. 여기서 최찬숙 작가는 유의미한 고행을 감행한다. 소유욕에 잠식된 땅의 형태를 대변해온 주요 소재이자 한국 미술가들의 주안점이었던 아파트에 기대어 촬영하는 대신, 아타카마 사막을 배회하며 인간의 소유욕에서 땅을 ‘이주시키는’ 픽션의 고행을.


회개보단 ‘매개’를 지향하는 순례자

혹시 고행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작가의 다채로운 시도를 ‘고된 작업을 수행한 예술가상像’으로 축약해버리는 건 아닐까 곱씹어본다. 오해를 막자면 고행이란 말을 쓴 이유는 <큐빗 투 아담>에서 나타나는 ‘순례자’적 특성에 연유한다. 다만 최찬숙은 기성 종교가 우러러본 신의 섭리를 체험하려는 순례자가 아니다. 이 지점을 파고들어보자. 그는 지구와 지구 바깥을 잇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알마 기지를 촬영하다가 ‘페니텐테스penitentes’라 불리는 지형을 발견한다. 영상 속 진술에 따르면, 무릎을 꿇은 참회자와 닮은 얼음기둥 모양의 이 조각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해당 기록만 보고선 참회자가 자아내는 이미지에 휩쓸린다면 다음의 해석이 가능하다. 최찬숙은 페니텐테스에서 연상되는 참회자의 형상을 빌려 땅을 향한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지적하고 관객에게 회개를 종용하는 걸까. 이런 해석본은 윤리적으로 말끔해 보이나 <큐빗 투 아담>에서 느껴지는 사유의 역동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므로 나는 달리 말해보려 한다. 최찬숙은 순례자라는 캐릭터에 빙의하여 회개보단 ‘매개’를 지향한다고. 매개란 떨어져 있는 둘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는 실천이다. 일례로 작가는 페니텐테스라는 지형이 참회하며 기도하는 인간과 닮았다는 측면에서 더 나아간다. 지면에 무릎을 붙인 채 기도하는 인간상에서 비롯된 땅과 밀착된 전형적 이미지 Ⓐ, 태양을 바라보는 얼음기둥 모양과 페니텐테스가 다른 행성에서도 발견된다는 언급에서 보듯 상승의 방향성에서 비롯된 땅과 거리가 있는 이미지 Ⓑ가 서로 중첩된 상태를 페니텐테스에서 상상해낸다. 이처럼 매개를 잘 수행하기 위해선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떠올려 두 대상을 비교해보고 속성을 도출해내는 유비analogy적 사고방식을 지녀야 한다.



땅의 이주를 시도하다: 최찬숙이 추구하는 유비

최찬숙이 <큐빗 투 아담>에서 추구하는 유비엔 두 가지 쓰임새가 있다. 첫째, 오래전부터 정복과 소유로 점철된 땅-투기자본으로서 가치가 매겨지는 부동산이라는 땅-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땅-비트코인처럼 공유지의 환상을 가장한 채 새로운 점유 경쟁이 펼쳐지는 디지털 금융자본으로서의 땅까지. 최찬숙은 땅에 대한 지배적 인식을 떠올리며 이를 시대적 양상과 맞물린 땅의 모습으로 계보화함으로써, 땅에 관한 대안적 사유를 펼칠 터를 마련한다.  

둘째, 사실 이 대목이 중요한데 양자적 인식론자의 길을 택한 최찬숙에게 유비는 필연적이었다고 본다. 설명을 강화하고자 ‘유비의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의 견해를 떠올려본다. 그가 쓴 『부분적인 연결들Partial Connection』은 인류학 이론서이면서 인간이 이미지를 어떻게 지각하고 접근하는지 알려준다. 스트래선은 인류학자가 인간과 문화를 탐구할 때 유비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강변했다. <큐빗 투 아담> 속 작가의 방법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기에 관련된 실례를 잠깐 설명해보고자 한다. 스트래선은 유비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바록 부족민의 퍼포먼스에 주목했다. 바록 사람들은 나무를 뿌리 뽑아 거꾸로 세운 뒤 나무뿌리를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다음 나무기둥은 땅에 박혀 잘려나가고, 가지는 부러져 나뭇가지가 땅 밑으로 자라나는 상상이 가미된 의식을 거행했다. 이를 통해 바록 사람들은 부계 사회가 행해온 역할과 모계 사회의 그것이 역전되는 상징을 확인하며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고 한다. 근데 스트래선은 전술前述한 단계에서 해석을 멈추지 말자는 듯 설명을 이어간다. 스트래선이 보기에 바록 사람들은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줄 아는 부족이었다. 바록 사람들의 생각엔 나무는 뿌리가 땅으로 향하고 가지가 하늘로 뻗어 있는 기존 상태와 그 반대 상태가 공존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를 감안한 바록 사람들은 그들만의 의식을 통해 나무의 전형적인 외관에 잠재돼 있던 ‘물구나무 선 나무의 이미지’를 끌어낸 셈이다.

한 존재에겐 그 존재의 기존 상태와 반대 상태가 얽혀 있다는 것 그리고 후자를 망각하지 않은 채 이미지로 구현해보는 일. 이는 아타카마 사막을 통해 땅과 밀착된 이미지, 땅과 거리가 먼 이미지가 중첩된 상태를 고려한 채 인간의 규격화된 시선에 포획된 땅의 형상을 탈피시키는 최찬숙의 의지와 조응한다.


최찬숙의 공중전과 미술: 밀어 올림과 밀어버림

이 의지는 땅을 이루는 개체를 땅에서 밀어 올려 땅과 떨어지게끔 하는 시도에서 확인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이주민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했던 최찬숙은 줄곧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삶을 살았다고 작품과 인터뷰에서 밝혀왔다. 그랬던 그가 <큐빗 투 아담>에선 땅과 인간 사이를 이어온 관점의 역전을 시각화한다. 고정된 땅에서 밀려나 이주하는 인간의 이미지 대신 고정된 땅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땅과 땅에 기인한 개체(돌)를 하늘로 ‘밀어 올리는’ 땅의 이주를 재현하는 것이다.

땅의 이주라는 모험을 벌이는 최찬숙은 그래픽 작업을 통해 땅에 기반한 개체인 돌을 시종일관 땅에서 밀어 올린다. 인간의 노력으로 아무리 시도해봐야 하늘에 닿을 수 없는 돌이라는 개체의 수평적 범위의 운동은 수직적인 축으로 전환된다. 동시에 최찬숙이 드론 카메라를 활용하는 방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 드론 카메라의 시각적 구도는 촬영자가 카메라에 올라탄 기분으로 상공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지상의 데이터를 샅샅이 수집하는 수직성에 가깝다. 허나 <큐빗 투 아담>은 드론 카메라를 동원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을 탐사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프로그램이 아님을 상기하자. 최찬숙과 촬영 팀은 드론 카메라를 통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관한 자연 다큐멘터리적 서술과 무관한 공중전을 펼친다. 묘하게도 <큐빗 투 아담> 속 드론 카메라의 움직임은 아타카마 사막에 연유한 땅의 데이터와 그 이미지를 모조리 파악하고 채취함과 거리가 멀다. 작가는 지상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데이터를 채집하는 데 활용돼온 드론 카메라의 기존 특성을 빌려와 성찰적 비행을 수행한다. 온갖 불평등을 조장하는 데이터로 땅을 인식하는 데 여념이 없는 인간에 대한 경고등을 킨 채로. 작가의 눈을 대리하는 드론 카메라는 이동할수록 앞서 보았던 땅의 이미지를 수평적인 축 내에서 밀어버리는 운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작가가 문제 삼는 ‘데이터로서의 땅’에서 나타난 부작용과 인간의 부조리를 소거하는 의식 아닐까.


맹지 미술: 최찬숙, 개체가 삭제되지 않는 땅을 꿈꾸다

이차대전 막바지 독일 도시를 향해 쏟아진 공습을 두고 교만한 평온으로 대응해버린 독일 사회의 정서적 풍경을 문제 삼았던 작가 W.G. 제발트. 그는 『공중전과 문학』의 서두에서 SF 소설가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상상의 크기』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한다. “삭제 기법은 모든 전문가의 방어 본능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나는 메릴린 스트래선의 주장을 떠올려본다. 스트래선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잘려나간 것들을 왜 외면해선 안 되는지 논했다. 스트래선은 절단이 관계의 단절이 아니며 관계의 새로운 구축을 위한 상태라고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큰 것에서 절편切片된 개체는 전체의 성립에 이바지하는 단위가 아니며 전체에 깃든 복잡한 속성이 줄어든 존재도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는 개체가 부분-전체라는 관계에 잠식되지 않은 채 배제되어온 관계성을 복원하고 새로운 관계성을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역사적 사건이 삭제해놓은 문제의 다발, 참상에 묻혀버린 관계의 복잡성을 삭제하지 않으려 했던 제발트, 잘려진 것의 옹립을 통해 관계의 성립을 사고했던 스트래선. 두 사람의 사유를 최찬숙의 작업과 매개해본다. 그리하였을 때 “모든 상호적 관계들을 고려”해야 함을 의식하며, “개체가 개체로서 개체와 접촉할 수 있는 곳”(이상 인용된 대목은 <큐빗 투 아담>)을 꿈꾸는 작가의 의중을 떠올려본다.

개체를 지향하는 최찬숙은 에필로그에서 어머니의 임종에서 느꼈던 바를 짧은 분량 가운데서도 세세히 쪼개어 회고하며 자신에게 소속감을 강요하는 공동체 혹은 사람에 대한 섣부른 기대를 유보한다. 아울러 몸으로 감각되는 어머니의 죽음, 임신 상태의 자신을 감각하는 몸을 두고서 이를 여성의 몸과 대지의 일체로 연결 지어 여성의 삶을 단편적으로 정의해온 미술사적 판단과도 거리를 둔다.

부동산을 알아보는 데 쓰이는 지적도와 지상의 데이터를 총체적으로 응축시켜놓으려는 구글 어스 사이를 오가며 피로감을 느낀 작가는 사회를 지배해온 땅과 인간 사이의 주류적 관계 양식 속에서 개체가 삭제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지 논의의 땅을 개척하려 한다. 이 땅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드는 땅과 관련 없는 ‘사유의 맹지’다. “어느 누구의 것도 모두의 것이 될 수도 없는”(<큐빗 투 아담>), 그리하여 사유지도 공유지도 지향하지 않은 채로 거리가 먼 개체들이 서로 얽힌 채 관계를 맺는 맹지다. 나는 이 맹지 미술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