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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눈이 영혼의 창이라면, 불투명하고 관통할 수 없는 얼굴의 표면은 무엇인가?

파비안 고펠스로이더 박사
철학가, 취리히 미술대학, 베를린자유대 철학부 인스티튜션 의장 


얼굴은 인간의 파사드이다. 얼굴의 불투명함은 내부를 보호하는 동시에 내부를 외부로 표현한다. 투명성을 거부하고 숨겨진 표현을 가시화한다. 얼굴은 공과 사의 영역 사이에서 마치 국경 경비대처럼 작동한다. 국경 경비대가 통과시켜주는 것만이 사람의 얼굴에서 드러난다. Per-sonare (‘~를 통하여 말하다’라는 라틴어). 배우의 가면을 통하여 울려퍼지는 소리는 한 개인을 특별한 인간으로 나타낸다. 가면으로 인해 감춰진 것은 유사한 것끼리 편을 만드는 세상 속으로 소멸되지 않도록 한다. 얼굴은 인간의 가면이다. 이 가면 속에서 개인은 인간의 사적인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에게 노출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또한 이 가면은 타인이 제일 처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위장의 장치이다. 불투명함(opacity)은 투명하지 않음(intransparency)이 아니다. 눈이 영혼의 창인 것처럼, 얼굴은 개인의 연약한 정신이 주변 환경의 요구에 따라 조율된 장소이다. 얼굴은 하나의 모델이다. 유사한 얼굴들에서는 공통적인 일반성을 띈다. 다양한 가족 사이에서 닮은 점을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개인만의 유일한 얼굴을 인지할 수 있다. 파사드가 주변 환경에서 두드러지는 것처럼 각 개인의 파사드 또한 그렇다.

개인성이 무효화된 연기자의 표면은 전형적인 눈코입이 새겨진 가면이다. 이처럼 얼굴은 인간을 하나의 전형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람은 그 자신과 닮은 무리에 속하지만 또한 그 무리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양면적이다. 각각의 얼굴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얼굴은 우리 삶의 지도책이다. 눈코입 안에 인간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경험된 것이 흔적으로 합쳐지는 장소이다. 시간이 얼굴에 밀착된다. 과거는 현재와 뒤섞인다. 지금이라는 순간 속에서만 기록적 가치를 획득하는 저장고이다. 살았고 살기를 지속한다. 기록하고 흐릿해진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진동 속에서만 인간의 존재가 형성된다. 얼굴은 인간의 깊이를 쉽게 알아챌 수 없도록 방해하기 때문에, 얼굴은 또한 인류의 모든 측면들이 끝없는 교류 속에서 합체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사적, 공공, 일반성, 개인, 과거, 현재. 얼굴의 불투명성은 얼굴을 심연의 장소로 만든다.
이 불투명한 불가해성은 작가의 작품 안에 매혹의 정점을 이룬다. “Folgen der Spur” 작품은 얼굴의 아름다움의 차원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물 속에 누워있는 친구의 잉크 초상화 속에 또렷했던 이목구비가 단계적으로 흐려지는 과정의 표현은 인식에 대한 철학적인 비평이나 인생의 헛됨을 상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멜랑콜리한 장면은 정체성의 손실에 대한 애도를 내포하지 않는다. 대신 생명체에 새로운 요소들을 불러오기 위해 필요한 부식의 과정을 가르킨다. 단순한 사라짐이 아닌 변신. 새롭고 다른 것이 우리의 시각 범주에 부합하지 않을 때, 공격적인 부식의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멜랑콜리한 아름다움의 강도가 마지막이라는 것이 아니다. 대신 전이(Transotion)이다.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도 인지할 수 있는 존재 안에서의 전이.

작가는 “1218”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않는 것,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과의 관계를 붙잡고 싸운다. 두 명의 무용수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을 시각적으로 겹쳐 프로젝션한 이 작품에서는 영구적으로 흐려질 이미지들이 겹쳐짐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특유한 형식과 이 두 세계 사이의 상호적인 침투의 과정을 볼 수 있다. 단지 손, 발, 얼굴 만이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길 반복하면서 몸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움직임들 속에서 반응하는 것처럼 안무없이 이루어지는 몸의 대화는 앞으로 뒤로 여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스크를 쓴 무용수들의 훈련된 얼굴은 계획없이 진행되는 이벤트에서 무게 중심을 이룬다.. 죽음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는 파편이 아니다. 심연은 각각의 인간의 한 부분처럼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 일상의 반복은 이 점을 은폐한다. 보이지 않는 목마름을 보이는 세상으로 열어주기 위하여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봐야한다.

“Private Collection” 작업에서 작가는 인간의 얼굴에 담겨있는 불가사이함에 대하여 한층 더 깊이 탐구한다. 인간의 얼굴에 기록된 경험은 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이 기록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과 인지의 부식 속으로 사라지는 것의 표현이다. 바람으로 부풀려진 거대한 플라스틱 봉지에 비슷한 얼굴들이 거대하게 프로젝션되어있다. 마치 숨쉬는 것 같은 플라스틱 봉지는 바람이 빠지고 부풀려짐에 따라 얼굴을 탄생시키고 다시 지워버린다. 어떠한 글이나 언어로도 이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다. 작가는 무용수의 몸을 대신 이용한다. 메시지를 판독하는 것 대신에, 인지된 것들의 영속성은 춤추는 몸을 이해한다는 신호로 작동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적당한 몸짓은 음악을 잘 이해하기 위한 가장 믿을만한 기준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뜻에서, 작품 ‘Private Collection’은 인간의 얼굴들의 교류를 피하는 연습 또는 리허설의 예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빈틈없고 종합적인 얼굴에 대한 연구는 “We remember Me” 프로젝트이다. 이 자전적인 연구는 “호유카이”라고 불리우는 한국에 사는 일본 여성과 이차세계대전 동안 “위안부”로 일본 군인들에게 창녀 생활을 강요받았던 한국인들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예술적 연구이다. 이 두 그룹의 여성들은 개인의 기억과 대조적인 단체의 정체성 사이, 개인사의 은폐와 폭로 사이, 그리고 이방인으로 남는 것과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말로 할 수 없는, 절대로 솔직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구연자이며 이야기의 목격자인 여성들만의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고, 연약하고 다치기 쉬운 이야기를 듣는다. 단어를 뛰어넘어, 그들의 신체적 존재는 진실과 그들의 이야기의 진정성을 보증한다.

체험한 것을 묘사하는 목격자의 이중성과 그 곳을 체험한 자만이 가진 분위기를 지닌 그녀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 묘사의 진실성은 입증된다. 이 여성들은 그곳에 있었고,목격자였으므로, 이 연구는 진술된 것들만의 보고서가 아니다. 이 작품의 타당성과 가치는 역사의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만에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호유카이와 위안부에 대한 질문은 근본적이 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을 봐야한다. 인간의 파사드, 역사를 통해 그려진 한 사람의 인생의 여정이 그려진 지도, 즉 그들의 얼굴을 봐야한다. 또한 우리는 역학들이 협력작용하여 연결되는 장소인 얼굴의 복합적인 이질성을 알아봐야한다. 얼굴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예술적 성숙의 전제 조건은 일상 생활 속의 개인의 움직임을 길들이는 것과 행동과 습관의 관찰을 통하여 인간의 불가사이함의 한계성을 열어주는 것을 수반한다. 어디에서나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는 굳은 표정과 인터뷰는 그 형식의 상투성에 반하지 않으며 예상가능하다. 이는 반복을 통하여 불투명한 불가사이가 사소한 표피로 변하며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이런 목격자는 자주 나타나지않는다.

작가의 호유카이와 위안부에 대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예술적 연구는 체계적으로 담론을 다시 예민하게 깎아내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간다. 작품의 가능성은 편안한 연설의 무게감, 앵무새와 같은 기계적인 반복, 각각의 그룹마다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깨뜨리는 것을 통해 까다롭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작동한다. 인터뷰에서 촬영하고 설치에 프로젝션된 얼굴들은 투명하지 않고 누구인지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표정은 첫째로 불투명한 불가사이성, 불완성과 표현의 파손 안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학습되지 않은 표정이 아니라 숨김없는 얼굴이 그 얼굴의 이야기가 지닌 진실을 말해준다

Dr. Fabian Goppelsröder
파비안 고펠스로이더 박사 (철학가) 2011 년, 베를린과 파리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스탠포드대학교(미국 캘리포니아) 비교문학 박사이며, 현재 베를린자유대학교와 취리히예술대학교에서 부교수와 철학부장으로 재직 중이다